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리 외방전교회 (문단 편집) == [[한국]] 진출 == || [youtube(P_j5lc5uing)] || || 19세기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반도 선교 활동, 순교 역사를 담은 영상. CPBC [[가톨릭평화방송|{{{#white 가톨릭평화방송}}}]] 제작 || 1825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 [[레오 12세]]는, 1827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 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 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다. 여기에 [[포르투갈]]에서 파견한 [[마카오]] 총독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는 [[예수회]] 등의 동아시아 지역 다른 수도회에서도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설쳐대는 꼴을 못 봐준다는듯 견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ére, 蘇)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조선으로 입국하기가 어려워 기회를 보던 중 1835년 10월 조선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부터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의 박대 내지는 냉대로 인해 몹시 고생하였다. 프랑스 출신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배우던 조선 출신 신학생들의 여건도 몹시 열악했다. 결국 조선인 신부들이 서품을 받은 지 얼마 후, 파리 외방전교회는 본거지를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기고 말았다.] 1836년 [[피에르 모방|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 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소년 3명[*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으로 사망했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신부(성직자)|신부]]가 되었다.]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1845년엔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1849년에는 2번째 한국인 사제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배출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 성지|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é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읍|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 이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를 치른 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é, 申), 페롱(Fé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성직자)|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리델]], 페롱, 칼레 신부 등 3명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신부들이 순교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관례에 따라 '원한다면 고국으로 돌려 보내겠다.'고 권고했으나, 신부들은 귀국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하였다. || [[파일:etrange.jpg|width=100%]] || ||1864년, [[조선|{{{#white 조선}}}]]에 해외선교 사제로 파견되는 파리외방선교회 사제 4명의 모습을 담은 [[http://www.koreanart21.com/review/artWorldStory/view?id=6146|{{{#white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샤를 드 쿠베르탱, 1868년작. 왼쪽부터 위앵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이들 4명은 모두 [[병인박해|{{{#white 병인박해}}}]]로 [[순교|{{{#white 순교}}}]], 성인품에 올랐다([[한국 103위 순교성인|{{{#white 한국 103위 순교성인}}}]]). 그림 속의 뒤돌아보는 어린아이는 작가 샤를의 아들 [[피에르 드 쿠베르탱|{{{#white 피에르 드 쿠베르탱}}}]]으로, 근대 [[올림픽|{{{#white 올림픽}}}]]의 창시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 [[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D%95%9C%EA%B5%AD%EC%9D%98%ED%8C%8C%EB%A6%AC%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EC%88%9C%EA%B5%90%EC%9E%90.jpg]] || || 조선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 ||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생명은 보장되었고, 포교 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활발한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1911년에는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할 선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하였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에 교계 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원산(元山) 대목구, [[천주교 평양교구|평양]]·연길·의란·[[천주교 전주교구|전주]]·[[천주교 광주대교구|광주지목구]](知牧區)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 성직자로 운영되는 정식 교계 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10년 성직자 61명 중 15명이 한국인이었는데, 1920년에는 총 71명 중 30명이 한국인이었다. 1961년에는 총 516명 중 275명이 한국인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학교와 [[수녀회]]도 창립했다. [[앙투안 공베르]](한국명 공안국) 신부는 [[경기도]] [[안성시|안성]]에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루이 델랑드 신부(한국명 남대영)는 [[http://www.handmaids.or.kr|예수성심시녀회]]를, 피에르 생제르 신부(한국명 성재덕) 신부는 [[http://www.holyfamily.or.kr|성가소비녀회]]를 세워, 한국 땅에서 한국인 [[수녀]]들을 양성하였다. 현지 적응을 겸해 입국한 선교사들은 [[프랑스어]] 이름을 변형한 한국식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일부 명단은 아래 표와 같다. 세례명은 국내 표기를 따랐다. || 프랑스 이름 || 한국식 이름 || 세례명 || 비고 || ||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 소(蘇) 주교 || 바르톨로메오 || [[천주교 서울대교구]][* 당시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 || ||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 || 범세형 || 라우렌시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br][[기해박해]] 때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 || || [[피에르 모방]] || 나백다록 || 베드로 || 기해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자크 샤스탕 || 정아각백 || 야고보 || 기해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장 조제프 페레올 || 고(高) 주교 || 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3대 교구장 || || 시몽 베르뇌 || 장경일 || 시메온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br][[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 || 안돈이 || 안토니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br]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뤼크 위앵 || 민 신부 || 루카 || 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쥐스트 드 브르트니에르[* 풀네임은 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 백 신부 || 유스토 || 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피에르 오메트르 || 오 신부 || 베드로 || 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피에르 앙리 도리 || 김 신부 || 헨리코 || 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루이 볼리외 || 서 신부 || 루도비코 || 병인박해 때 순교, 103위 성인 중 한 명 || || 장 푸르티에 || 신요안 || 요한 || 병인박해 때 순교 || || 미셸 프티니콜라 || 박 신부 || 미카엘 || 병인박해 때 순교 || || [[펠릭스 클레르 리델]] || 이복명 || 펠릭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 || 스타니슬라스 페롱 || 권 신부 || 스타니슬라오 ||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공범 || || 장 블랑 || 백규삼 || 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 || ||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 민덕효 || 아우구스티노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 || [[니콜라 빌렘]] || 홍석구 || 니콜라오 || [[안중근]] 의사에게 [[병자성사|종부성사]] 집전 || ||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 원형근 || 하드리아노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9대 교구장 및 [[천주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 || || 플로리앙 드망즈 || 안세화 || 플로리아노 ||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 || 카미유 부이용 || 임 가밀로 || 가밀로 || [[천주교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감곡성당]] 초대 주임신부 || || 루이 델랑드 || 남대영 || 루도비코 || 예수성심시녀회 창립[br]대한민국 문화훈장 및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 || [[앙투안 공베르]] || 공안국 || 안토니오 || [[안법고등학교]] 설립[br][[한국전쟁]] 때 순교 || || 줄리앙 공베르 || 공안세 || 율리아노 || 앙투안 공베르의 동생[br]한국전쟁 때 순교 || || 피에르 생제르 || 성재덕 || 베드로 || 성가소비녀회 창립 || || 르네 뒤퐁 || [[두봉]] || 레나토 ||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br]상지학원([[가톨릭상지대학교]]) 설립 || || 피숑 레옹 || 송세흥 || 레옹 || [[덕정리성당]] 초대 주임신부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